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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大道無門’의 삶, 김영삼 前대통령 현충원에 잠들다


민주화에 앞장선 투사, 허를 찌르는 어록을 남긴 언어의 마술사, 노무현·김무성 등의 인물을 정치계로 영입한 용인술(用人術)의 대가 등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을 수식하는 단어는 그가 대한민국 정치 역사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거산(巨山)’이라는 호가 걸맞은 정치인으로서 대한민국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김 전 대통령이 11월22일 영면에 들었다.


11월22일 새벽 0시22분, ‘긴급뉴스’ 하나가 터져나왔다. 서울대학교 병원 중환자실에서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이 향년 88세의 나이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인해 서거했다는 소식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故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오랜 기간 군사정권에 맞선 우리나라 민주화의 산증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해외언론도 당일 서울발 긴급기사로 빠르게 보도하는 등 국내외 이목을 집중시켰다. 민주화에 앞장선 투사, 허를 찌르는 어록을 남긴 언어의 마술사, 노무현·김무성 등의 인물을 정치계로 영입한 용인술(用人術)의 대가 등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을 수식하는 단어는 그가 대한민국 정치 역사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거산(巨山)’이라는 호가 걸맞은 정치인으로서 대한민국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김 전 대통령의 삶 속으로 들어가 봤다.


민주화에 기여


1927년 12월20일,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태어난 故김영삼 전 대통령은 1947년 경남중학교를 거쳐 1951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장택상(張澤相) 총리의 인사담당 비서로 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1954년 28세(만26세)의 나이로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된 후 총 9번 의원직을 역임한 최연소·최다선 의원이었으며 1993년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문민정부의 서막을 열었다.


故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의 군부 독재 시절에 민주화를 위해 온몸을 다 바쳐 투쟁했던 정치인으로 기억된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벌어진 뒤, 쿠데타 세력에게 계속해서 군정에 참여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연달아 거절했다. 이후 1963년 3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정연장을 발표하자 윤보선 등과 함께 군정연장 반대 데모에 참여했다가 이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는 고난을 겪기도 했다. 1969년 6월에는 박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을 가하던 중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초산테러를 당하기도 했으나, 다행히 차 안에 있어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1979년 8월 신민당 총재시절에는 YH무역여공농성사건 이후 9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계속해서 박정희 독재 정권 타도를 부르짖자 김 전 대통령은 79년 10월 의원직에서 제명당했으며 이어서 가택연금 되는 고초를 겪었고 이 때문에 부산·마산 등지에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유신 정권 말기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굴하지 않고 군부독재에 맞서 싸울 것을 다짐했다.


1979년 10·26사태 이후엔 박 전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측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군부 독재엔 끊임없이 반대하며 투쟁했더라도 고인에겐 기본적인 예를 갖추며 조의를 표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군부 독재는 끝인듯싶었으나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아 12·12사태가 일어났다.


김 전 대통령은 전두환 정권 하인 1983년 5·18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23일 동안 단식투쟁에 돌입했다가 몸이 쇠약해져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2003년 단식투쟁을 하던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를 방문해 “나도 23일간 단식해 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는 말을 남겼다. 1987년 6월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조치에 맞서 크게 반대하며 대학생들의 호헌철폐 시위에 동조했다.


1987년엔 직선제로 실시된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문민통치’와 ‘군정종식’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으나 당선되진 못했다. 허나 그가 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에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산시키고 전두환·노태우의 비자금 의혹을 폭로하는 등 군부 세력 척결을 위한 시책을 하나하나 실행해 나갔다.


문민정부 시대, 빛과 그림자


1992년 14대 대선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후보가 격돌했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측 선거대책회의 참석자들 사이에서 “우리가 남이가”라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이 나와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오히려 이것이 영남표를 집결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결국 1992년 12월 18일 김영삼은 김대중을 193만표 차로 꺾고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 취임 이후부터 각종 개혁적 정책들을 펴나갔다. 대표적으로 ▲신군부와 하나회 숙청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수수 폭로·사법처리 ▲조선총독부 철거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제도 도입 ▲지방자치제 전면실시 ▲금융실명제 실시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금융실명제의 경우 지하경제의 자금 흐름을 막고 금융자산소득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되면서 국가 세수확보에 도움을 주었다는 평을 듣는다.


또한 사회적으로 군부 독재를 비판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찾았다. 1993년 6월에는 “5·16 군사 정변은 쿠데타”라는 발언을 했고 각 교과서에 ‘5·16 군사혁명’으로 기술된 것을 ‘5·16 쿠데타’ 혹은 ‘5·16 군사정변’으로 고치게 했다. 1993년 8월부터는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를 한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도 ‘광주사태’로 기록되었던 것을 ‘광주항쟁’ 또는 ‘광주민중항쟁’으로 격상시킬 것을 지시해 교과서에 실리도록 했다. 덧붙여 예술가와 언론의 사회비판을 전면 허용했다. 대일 관계에 대해서는 1993년 3월 언론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히면서도 일본 측 관리들의 잇따른 망언에는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며 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문민정부의 그림자도 있었다. 1994년 10월에는 성수대교 붕괴 사건으로 인해 대국민 사과담화를 발표했다. 1997년 1월엔 연두(年頭) 기자회견을 통해 노동법개정은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해 노동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는 노동법이 파업의 원인이 됐다면서 “노사분규가 자꾸 일어난다고, 그러면은 우리 기업인들이 자꾸 외국에 나가도록 쫓아내는 게 돼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1997년1월부터는 한보철강, 기아자동차 등이 줄줄이 부도를 맞았고, 외환금융이 악화되어 IMF 사태가 터지게 되었다. 이에 12월 정부는 국제 통화 기금(IMF)에 금융 지원을 신청하는 수모를 겪었고 한동안 한국 경제는 기나긴 침체기에 빠졌다.


측근의 비리도 문제가 되었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가 한보비리에 연루되어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이 때문에 다시 한 번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해 국민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렇듯 재임기간 5년 동안 숱한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그때마다 김 전 대통령은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대국민 사과를 한 횟수는 총 6번으로 그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하는 문화를 자리 잡게 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에게 자리를 물려준 그는 퇴임사에서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며 국정 운영이 순탄치 않았음을 암시하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후임 대통령들에 대한 말말말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 퇴임 이후에도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민주자유당과 신한국당의 지도자로서, 상도동계의 지도자로서 여야에 널리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굵직한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스스럼없이 밝혔다. ‘3김 시대’를 함께 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 뒤 자신에 대한 내사를 하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년6개월 동안 내 뒷조사를 했으나 나온 게 없지 않느냐”, “(김 전 대통령이) 무서워서 영국으로 도망쳤다”며 서운함을 내비쳤다. 2009년 김 전 대통령의 병문안 자리에서는 김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세계에 유례가 없는 특수관계, 애증이 교차한다”고 답했다.


故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권변호사로 종횡무진 하던 1986년 김 전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정치계에 입문한 케이스다.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1990년 3당 합당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이 반대를 하면서 둘은 결별하게 된다. 이어서 2004년 3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것에 관련해서는 “사필귀정”이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관해선 김 전 대통령은 늘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전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부
터 터진 BBK 사건과 관련해서 “이것은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대선 판도를 뒤집어보려는 전형
적 정치공작일 뿐”이라며 그를 옹호했다. PK출신이며 박정희 정권에 대항했던 김 전 대통령은 TK출신이자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과 줄곧 대립각을 세워왔다. 하지만 2012년 대선 직전에는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의사를 표명했고, 이에 박 대통령도 전화로 화답했다.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


박 대통령은 故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해외순방을 마치고 11월 23일 빈소를 찾았다. 이후 건강상의 문제로 26일 영결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영결식 당일 오전 김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다시 방문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만26세에 최연소로 의원으로 당선되어 향년 88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故김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곡진 면을 거치며 한국 사회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끼쳤다.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는 그의 퇴임사에서 느껴지듯 60년이 넘는 그의 정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11월22일, 한국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별이 졌다. 큰 족적만큼이나 故김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아직 분분하다. 故김영삼 전 대통령이 남긴 거대한 족적에 후세대가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될지, 그가 거쳐 온 기나긴 정치인생 만큼의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MeCONOMY Magazine December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