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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국군포로, 그들을 잊지 마세요!

6.25전쟁이 끝난 지 올해로 62년이 지났다. 긴 시간 속에 비참한 전쟁의 흔적은 사라졌다지만 여전히 전쟁의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사는 이들이 있다.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다 적국으로 끌려간 수많은 젊은 장병들. 살아생전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다 적국에서 죽어간 이들. 국군포로들의 삶을 조명해 본다.

북한에 의한 남침으로 발발된 6.25전쟁은 한반도 전역에 고통의 씨앗을 뿌렸다. 조국을 위해 전쟁터에 뛰어든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었고, 일부 청년들은 목숨은 부지했지만 포로로 잡혀 사지로 끌려가게 된다. 전쟁 3년 만인 1952년 7월27일, 애타게 기다리던 휴전이 선포된다. 국제연합군 총사령관과 북한군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이 합의한 정전협정에는 ‘쌍방은 그 수용 하에 있는 송환을 주장하는 모든 전쟁포로를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후 60일 이내에 송환 인도하며 어떠한 방해도 가하지 못한다’고 규정하였다.


정전과 함께 북한에 억류되었던 국군포로들은 곧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남한에 억류되었던 북한군 포로는 7만6천여 명 모두 귀환했지만 북한에 억류되었던 국군은 8천343명만이 귀환한다. 당시 유엔군 측이 6.25전쟁 중 실종된 국군을 8만2천여 명으로 추정했지만 북한으로부터 돌려받은 국군포로의 수는 그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북한, “북한 내 국군 포로 없다”


유엔군 측은 정전 이후 1960년대까지 총 11차례에걸쳐 북한 측에 미송환 국군포로 문제의 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국군포로는 전원 송환하였고, 강제 억류 중인 국군포로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후 북한은 국군포로를 북한 공민으로 편입하여 자신들의 공식적인 입장을 정당화하고 포로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국가사업에 활용하였다. 국방부는 6.25전쟁으로 실종된 국군을 4만1천971명으로 파악하고, 이 중 포로교환 시 귀환한 8천726명과 유가족 신고 등으로 전사 처리된 1만3천836명을 제외한 1만9천409명을 실종자로 추정하였다. 이 중 상당수가 미송환 국군포로로 북에 억류되었을 것으로 보았다.(북한인권정보센터, 2009.4.9)


북한이 국군포로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북한에 남아있던 국군포로들은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하는 세월동안 적국에서 죽어가야 했다. 전쟁이 끝나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들은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최전선에서 싸운 죄밖에 없었다. 우리정부는 “포로는 없다”는 북한의 말 한마디에 가로막혀 아무 손도 쓰지 못했고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실제로 우리 국방부는 단 한 차례도 정식으로 북한에 국군포로 송환을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그러던 1994년 조창호 소위(이후 중위로 전역)가 자력으로 북한으로부터 탈출하여 대한민국 땅을 밝으면서 국군포로들이 북한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대한민국이 얼마나 철저히 그들을 외면했는지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후 우리 국방부는 1990년대 말부터 한국에 들어온 탈북 국군포로들과 다른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1주간의 합동심문과정을 통해 당시 약 500여 명의 국군포로가 북한에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스스로 조국으로 돌아온 국군포로, 현재 39명 생존


현재 북한으로부터 탈출하여 한국에 들어온 국군포로는 총 80명이다. 이들은 전원 자력으로 북한을 탈출하였다. 그 80명의 귀환용사 중 41명이 운명하고 현재는 39명만이 생존해 있다. 그들의 평균 나이는 여든이 넘으며 그 중에도 11명은 건강이 좋지 않아 병상에 있는 상태이다. 이제 그들의 역사를 직접 듣고 기록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11월20일(금) 국군포로 귀환용사 6명이 회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물망초 사무실을 찾았다. 물망초는 탈북자, 국군포로, 납북자들을 위해 힘쓰는 단체로 정부기관과 민간단체를 통틀어 최초로 국군포로 신고센터를 세우고, 국군포로송환위원회를 통해 북한에 남아있는 국군포로 송환을 위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날 귀환국군용사회와 물망초는 귀환용사들의 복지 정책 방향에 대해 논했다. 이후 인터뷰를 진행하며 만난 귀환용사들 중에는 북한에서의 무상한 세월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머금는 사람도 있었고, 조국에 대한 서운한 감정에 복받치는 감정을 토하듯 내뱉는 사람도, 체념한듯 입을 꼭 다문 사람도 있었다.


적국 북한에서 국군포로의 삶


귀환국군용사회 부회장 한재복(81)씨는 1951년 4월, 만 17살에 훈련소에 입소하여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7사단 수색소대에 배속된 그는 강원도 최전방에서 근무하여 전투에도 참여 했는데, 입대한 지채 1년이 안 된 1951년 12월 새벽3시,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그때는 금방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소. 하지만 황해도 수용소, 자강도 수용소 등을 거쳐 탄광에서 노예와 같은 채굴생활을 하며 그야말로 개처럼 부려졌습니다. 국군의 명예에 걸맞게 전향하지 않고 50여 년간 북한의 억압과 인권유린을 인내하면서 자유대한의 품으로 올날을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생활해왔습니다”라며 울분을 삼켰다. 하지만 기다리던 국가는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았고 2001년 그의 나이 만 67세에 생사를 건 탈북을 시도하여 대한민국에 귀환하게 됐다고 했다.


귀환국군용사회 회장 유영복(85)씨도 포로로 끌려가 북한에 있는 동안 탄광과 광산을 오가며 죽도록 고생하다 47년 만에 자력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때가 되면, 대한민국 국가가 있고, 정부도 있고, 대통령도 있으니 때가 되면 데리러 올 날이 있겠거니 하고 기다렸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50년이 돼도 소식이 없고 죽을 날이 다 되어 가니 내 조국을 밟아라도 봐야겠다고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내 발로 한국에 들어온 거예요. 나는 대한민국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는데 조국은 나를 잊어버린 것 같아서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대다수의 귀환용사들은 이와 비슷한 인생 경로를 거쳤다. 젊은 나이에 포로가 되어 북한의 일하는 기계가 되어 최하위 계급으로 살았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노역을 시킬 수 없을 정도가 되자 북한은 그들을 퇴물취급하며 사회에 내던져 버렸다. 감시의 눈으로부터 멀어진 그들은 죽기 전에 고국의 땅을 밟아 보고 싶다는 오직 이 한 가지 꿈을 품고 죽을 각오를 하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국군포로 귀환용사들의 조국에서의 삶


탈북 국군포로들은 대성공사라는 탈북자 심의기관에서 북한 생활 기간의 행적 등을 조사받는다. 이후 소속 부대의 전역식 행사에 참가하면 이로써 현역 군인 신분이 종료된다. 정부는 국군포로들이 북한에 억류되었던 시절을 현역 복무로 인정하여 억류기간에 대한 보수를 지급한다. 그리고 안정적인 국내 정착을 지원하기 위한 위로지원금 및 이외 주거지원, 의료지원 등을 제공한다. 현재「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및 시행령을 통해 그들을 보호하고 (사)북한인권정보센터를 통해 2012년에는 「국군포로 정착지원센터」도 설립되어 현재 금전적인 지원 수준은 그리 적지 않은 편이다.


조국이 잊어버린 이들


그럼에도 직접 만나본 귀환 국군용사들의 삶은 그리 좋지 못한 형편이었다. 자력으로 탈북 하는 과정에서 고액의 브로커 비용을 대야 했고,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을 위해 돈을 송금하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50여 년간을 북한에 살면서 익힌 생활방식을 쉽사리 바꾸지 못해 고율의 이자를 준다는 친인척의 꾐에 빠져 정착지원금을 믿고 맡겼다가 사기를 당한 사례도 있었다. 또 2013년 4백여 명의 탈북민들이 속아 160억여 원의 피해를 입은 한성무역 사기사건에 관계된 이들도 있었다. 노령으로 구직이 어려운 상황에서 어르신들이 일시금으로 받은 돈을 모두 날려 공공근로, 폐지 줍기, 세차일 등으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죽는 날이라도 고향 땅에 있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목숨을 내놓고 한국에 온 이들이었지만 정부는 오랜 세월그래왔던 것처럼 그들을 방치하고 무시할 뿐이었다.


“국군의 본분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살았고, 스스로 목숨 걸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국가는 돈으로 무마하려는 것처럼 우리를 대우했죠. 긍지가 없잖아요. 이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왔겠는가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말한다. 한국은 아직 전쟁 중이라고.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한과 북한은 서로를 ‘주적’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북한은 한국으로부터 돌려받은 포로들을 영웅으로 칭하며 최고로 대접한다. 북한의 당과 군에 대한 충성심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북한은 군인 영웅에 대한 철저한 보상과 이들을 활용한 선전을 통해 북한의 젊은이들에게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워 공적을 세우는 것의 긍지를 일깨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40여 년간 그들의 존재를 잊은 채 살았고 탈북 국군포로들이 버젓이 살아 증언하고 있음에도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실제로 현충원에도, 전쟁기념관에도, 하다못해 교과서에도 한국이 찾아오지 못한 국군포로에 대한 내용이나 끝까지 조국을 버리지 않은 귀환용사들에 대한 내용은 살펴볼 수 없다. 백발노인이 돼서도 국군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조국으로 돌아온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교육한다면 이는 귀환용사 개인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국가를 내세우는 일이 된다. 후대들에게 안보교육도 되고 본보기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는 길마저 쓸쓸하게


지난 11월4일(수) 국회에서 ‘국군포로 삶의 실태분석 및 복지향상 방안’에 대한 토론회가 (사)물망초의 주관으로 열렸다. 이 날 주최를 맡은 새누리당 이명수, 김성찬 의원은 토론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통해 “군대를 다녀온 후배로서 죄송스러운 마음이든다”며 “진정성 있는 방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위원장이자 법무법인 세창 대표인 김현 변호사는 국립현충원 내에 국군포로 추모탑건립, 용산 전쟁기념관 내 국군포로 기념관 설치 등 아직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국군포로들과 귀환용사들의 긍지를 드높일 수 있는 방안들을 내놓았다. 또 탈북 국군포로들에게 군부대, 정부, 지자체 강연 기회를 제공할 것을 제안했다.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탈북한 국군포로 가족, 손명화 통일라이프 대표도 토론자로 참석하여 “생환 국군포로 어르신들 한 분, 한 분 생계 조사를 하여 애로가 되는 점들을 풀어주는 방법을 연구하고, 공포증과 우울증으로 요양 시설을 기피하시는 점을 고려하여, 국군포로 어르신들의 쉼터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물망초 관계자 역시 국군 어르신들의 마지막 여생을 위해 의사, 간호사 물리 치료실 등이 있는 요양원 건립을 주장하였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6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국군포로 귀환용사 김복기(84)씨의 발인식이 있었다. 이날 처음부터 끝까지 유족과 함께 자리를 지킨 (사)물망초 권용훈 국장은 “빈소에는 유족 몇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며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마지막 가는 길이 너무나 초라하고 쓸쓸했다”고 말했다.


권 국장이 김복기 씨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4일 있었던 토론회의 토론을 통해서였다고 했다. 실제로 귀환 국군포로의 죽음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최초 귀환 국군포로인 조창호 중위 이후 처음이었다. 국방부는 현재 귀환 국군포로가 사망할 경우 현물 장례 지원과 국립 현충원 안장 등의 장례 지원을 하고 있지만, 그외는 모두 가족들의 사비에 의한 가족장으로 치러야 한다. 결국 이날 김복기 씨의 장례비용도 식장 대여비 외의 일체의 비용을 상주 측이 지출하였다. (사)물망초 권 사무총장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고인의 넋을 기리고 쓸쓸한 장례가 되지 않도록 정부차원에서 장례지원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며 전역식을 치른 부대에서 장례식을 실시하는 부대장을 치를 것을 주장하였다. 만약 정부에서 어렵다면 ‘물망초장’이라도 실시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미국은 ‘전쟁포로 실종자 담당국(Defense POW/MIA Office)’을 만들어 “You are not forgotten”(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미군이 참전한 세계 전역을 돌아다니며 유해 발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조국을 잊지 않고 대한민국에 찾아온 귀환용사들이지만 국가는 이미 그들을 잊은 것만 같다. 이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MeCONOMY Magazine December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