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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무소유공동체생활 ‘야마기시즘 실현지’ 산안마을을 찾다!


소유가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소유 때문에 고통을 받고 소유로 인해 인간의 관계가 갈라서는 요즘 조용히 던져보는 질문이다. “일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소유를 전제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소유가 없다는 전제하에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무소유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산안마을 윤성열 씨는 이렇게 말했다. 야마기시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냐는 질문에는 ‘허허’하며 웃음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산안마을의 정식 명칭은 ‘야마기시즘 생활 실현지’이다. 야마기시즘의 이념은 인간생활 전반을 영위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소유가 아닌 공유하자는 데 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여기에서는 무소유 공용 일체생활을 지향하는데 구성원 상호간에 돈거래가 없고 사람들끼리는 물론이고, 다른 자연계의 모든 것들과도 하나가 되어 사이좋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추구한다.


세계 40여 개소에서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조성되고 있는데 그중 한국에 있는 야마기시즘 생활 실현지는 1984년 몇 명의 야마기시즘 생활참획자로 시작하였다. 야마기시즘 실현지인 산안마을에서 만난 윤성열씨(산안마을 대표인데 칭호를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함)는 “사람들은 어떤 것에 대해 소유하려는 의식이 아주 강하다. 그러나 원래부터 우리는 우주만물을 공유해왔지 소유할 수 있는 건 아니다”라며 “소유라는 건 결국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상대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데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소유란 인간이 자기 맘대로 모든 것을 움직이려고 만들어 놓은 사고방식에 불과하다는 설명이었다.


윤씨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소유라는 개념이 없다”며 “서로가 같이 공존하면서 이어져가고 있는 관계인데 어떻게 소유 할 수 있겠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그러면서 “인간들은 아주 힘들게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 이렇듯 소유라는 건 애초에 실체가 없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소유물을 보고 뿌듯해 한다”고 말했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야마기시즘 실현지’ 생활을 들어 보았다.


Q. 무소유공동생활을 실천해 오고 계시는데요.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습니까?


A. 평소에 무언가를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세상에 없는 걸 굳이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힐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왔습니다. 소유가 없는 세상, 그런 걸 전제하지 않는 세계는 없을까에 대해 늘 고민해온 거죠. 그때 얻은 결론이 ‘없는 건 아닌 거 같다’는 거였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사이가 좋은 부부사이라든지 형제사이라든지 가족이 화목한 집들을 보면 서로 간에 소유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소유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안 주려고 하게 되면서 불화가 생깁니다. 그런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자고 생각한 겁니다. 현재 여기에 있는 우리 가족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이 운동은 일본에서 시작됐습니다. ‘야마기시 미요조’라는 사람이 처음 제창을 했는데 야마기시 한자를 한국말로 바꾸면 ‘산안’이 됩니다. 그래서 야마기시 마을이라는 이름을 한국명으로 해서 부른 겁니다. ‘산안’이라는 이름도 우리가 그렇게 부른 게 아니라 외부사람들이 불러 준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산안마을’이라고 만들어 진거죠. 정식명칭은 ‘야마기시즘 실현지’입니다. 야마기시 정신을 실현하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Q. 히스토리도 궁금합니다.


A. 이 운동은 1953년부터 일본에서 맨 처음 시작됐습니다. 전쟁이 끝나기 전인데 당시 일본인 야마기시 미요조(山岸已代藏 ; 1901∼1961)라는 분이 청년 때부터 꿈꾸던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분이 1901년생인데 그분의 형이 한국에 와 있어서 17~18세 때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의 식성과 친숙함에 이끌렸다고 해요. 당시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였을 때인데 그분의 눈에 그 자체가 굉장히 모순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서로 평화롭게 살아야 하는데 총과 칼을 겨루고 싸우고 괴롭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든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처음에 글을 썼다고 해요.


그러다 우연찮게 양계를 접하게 되었는데 자기가 추구하는 세계를 닭을 통해 실현해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닭 사회에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를 적용한 다음에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행복을 찾자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다 전쟁이 막바지가 이르게 되면서 먹고 살기 위해서 농사도 지었다고 해요.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야마기시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50년 9월의 태풍 '젠' 인데요. 당시 태풍으로 들판의 벼가 다 쓰러졌는데 한쪽 논에서만 벼가 쓰러지지 않았다고 해요. 그것을 한 농촌 보급원이 발견하고 알아보니 바로 야마기시의 논이었던 거죠. 이후 그의 농사법과 양계법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 농촌 보급원은 야마기시를 설득해서 농사법에 대한 강연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야마기시의 양계법에 공감하다가 점차 이러한 양계법을 낳은 독특한 사고방식에 관심을 갖게 됐고요.


Q.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시작된 건가요?


A. 우리나라는 1965년 일본 가스야마 세계중앙실현지에서 연수를 받은 것이 시초가 됐습니다. 이후 1966년에 화성시 고목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 부친(윤세식, 타계)과 조한규 씨가 처음 시작을 한 건데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고 해요.

실패도 거듭했고요. 그러다 제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그때 저는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24세 청년이었습니다. 야마기시즘 특별과정으로 일주일 간 하는 강습회가 있었는데 거기에 동참했다가 ‘아! 이런 걸 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걸 그때 알게 됐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다 두 번째로 시작한 게 저와 진병규 씨(타계)입니다. 그분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현재는 가족들만 여기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로 옮겨 온 것은 1984년입니다. 시행착오를 거쳐 처음에 시도했다 실패하고 두 번째도 실패하고 삼세판을 해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Q. 실패했던 원인은 무엇이었나요?


A. 지금 생각해 보니까 당시 실패했던 원인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뭘 몰라요. 무소유라고 해도 먹고 살기는 해야 하는데 경제행위 자체를 할 줄 모르는 겁니다. 기술도 없고, 돈도 없고요. 아무리 무소유를 추구한다지만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기초가 되는 것들을 사와야 하는데 아무 것도 없는 거죠. 또 함께 생활하는 분들도 일반사회에서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하는데 그걸 못 버리는 겁니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 실패했고, 두 번째는 무소유 일체의 생활을 하기 위한 기술이 없어서 실패한 거죠. 양계도 해보지 않은 일이다 보니 힘든 부분이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무소유 공동체가 확실치 않았어요. 대충 모여 있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실패를 거치니까 나중에는 나름대로 정리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세 번째에는 확실한 목표를 정했습니다.


첫 번째는 야마기시즘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만 모여야 한다. 두 번째는 무소유 생활을 할 사람이 아닌 사람은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는 일단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여기에 다 털어 넣어야 한다. 일반사회에서 살 때 아궁이에 있는 재라도 퍼서 가지고 와야만 사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는 거니까요. 사실 저희 집안은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조부께서 평양에서 자동차 사업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많던 돈이 사회변동에 의해서 한꺼번에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쩌면 제가 무소유를 추구하였던 것은 집안의 역사 속에서 소유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Q. 현재 산안마을에서는 몇 세대가 살고 있습니까?


A. 저희는 성이 달라도 전체를 한 가족이라고 부릅니다. 몇 세대가 사느냐 그런 측면으로 답변을 한다면 일곱 세대가 함께 생활합니다. 어른만 12명입니다. 가장 많은 연령이 84세이고 가장 어린 연령대가 8개월입니다. 많은 분들이 여기서 생활하는 아이들이 학교는 어디로 다니는지 궁금해 합니다. 일반학교에서 일반사회의 아이들과 동일한 교육을 받습니다. 여기는 일반사회와 격리된 공동체가 아닙니다. 행복을 위해 주변에 있는 모든 사회가 평화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동체인 겁니다. 다른 게 있다면 저희 가족들은 외부로 직장을 다니지 않습니다. 여기가 직장이고 가정입니다.



Q. 친환경 양계라고 들었습니다. 소개해주세요.


A. 저희 가족은 가능한 한 자연과 인위적인 것들을 조화롭게 해나가려고 합니다. 야마기시즘 사상 자체가 자연하고 인간의 조화를 깨달아서 행복한 사회를 가져오는 걸 목표로 하니까요. 그러한 정신은 닭을 기르는 데도 적용됩니다. 가령 닭의 자연스러운 성질을 살려 더 건강해 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희 양계방법은 이런 자연스러움에서 비롯 된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인위적인 것을 통해서 닭을 건강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가령 갓 태어난 병아리에게 현미 쌀을 먹게 해서 이를 소화시키기 위해 위가 적응토록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딱딱한 쌀을 소화시키기 위해 위가 아주 튼튼해지고 굵어집니다. 또 닭이 좋아하는 풀도 주고 거친 사료도 줍니다. 이런 양계방법으로 닭을 키울 경우 성계가 돼서 닭을 해부해보면 일반 닭의 내장에 비해 아주 길고 단단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닭들이 생활하는 계사는 자연의 이치를 적용해서 만들었습니다. 계사를 지을 때 천장을 통해 빛이 쭉 들어오게 만든 것이죠. 닭은 조류이기 때문에 산소 요구량이 많은 편입니다.


산소를 계속 보급하려면 겨울에는 찬 겨울 공기가 들어가서 바깥으로 빠지도록 하는 구조를 가진 계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낮에는 천장을 열고 커튼을 열면 닭들이 맘껏 뛰어 놀 수 있는 운동장이 됩니다. 반면에 밤에는 천장을 닫고 커튼을 내려서 닭들에게 편안한 숙소를 만들어 줍니다. 닭들의 생활을 최적화하기 위해 자연스러움과 인위적인 것의 조화를 잘 맞춘 것이라 할 수 있죠.


이렇게 하면 닭들이 건강합니다. 몇 년 전 조류 인플루엔자가 발생해서 전국의 양계장에서 기르는 닭들을 모두 폐사시키지 않았습니까? 저희 인근 8km까지 조류 인플루엔자가 감염되어 걱정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화성시가 저희 친환경 양계방법에 대해 인정해주고 우수농장이니 두고 보자고 해서 저희만 폐사처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계란만은 외부로 방출시키지 말라고 해서 모두 깨뜨려야 했는데요. 한 달 간 40만여 개의 계란을 깨뜨려야 해서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워낙에 계란이 단단해서 잘 깨지지 않다 보니까 도저히 손으로 깰 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굴삭기를 들여와서 처리해야 했습니다.


Q. 여기서 생산하는 계란이 어느 정도 됩니까?


A. 하루에 1만5천여 개 정도의 계란이 생산됩니다. 저희가 현재 17개 여동에서 계란을 생산하는데 일반 기계화돼서 나오는 양계의 한 동에서 나오는 양에 불과합니다. 아주 적은 양이죠. 대신 좁은 철장안에 닭을 가둬놓고 햇빛도 안 들어오는 곳에서 모이를 먹고 알만 낳게 하는 계란과는 맛에서 상당한 차이가 납니다. 저희 농장에서 생산되는 계란은 닭들에게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주어 행복한 닭들이 낳은 계란입니다. 맛있다는 것은 성분상의 차이만은 아닙니다. 묘한 게 유기농으로 길러 낸 채소들은 유기질 비료를 뿌린 채소와 맛이 다르잖습니까? 마찬가지로 닭들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계란이나 닭고기가 맛이 없습니다. 젖소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유 맛이 달라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계란을 먹어본 소비자들이 직접 먹어보고 맛이 다르다고 말해 줍니다.


Q. 양계 외에 다른 수익모델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A. 처음에는 채소라든가 과일 같은 걸 많이 재배했습니다. 인력이 적으니까 인근에 계시는 분들 손을 많이 빌렸죠. 잘 아시다시피 시골에는 연세가 많은 분들만 계십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할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몇 년 전 그만 뒀습니다. 지금은 그 밭을 모두 풀밭으로 바꿨습니다. 덕분에 닭들은 맛있는 풀 김치를 더 많이 먹게 된 것이죠. 그때 여기에 와서 채소를 사다 드시던 소비자분들은 유기농 채소를 원하는 분들이었는데 지금도 채소농사 좀 지어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적자도 많고 해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초제나 농약을 안 뿌리고 유기농채소를 길러내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니까요.


Q. 계란은 어디서 어떻게 판매하는지 궁금합니다.


A. 2주 또는 4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사서 드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계속해서 드시는 분들 인데 그런 분들께서 자체 직배 팀이 코스별로 돌면서 정기적으로 배달해주고 있습니다. 한집 한집은 배달은 어렵고 여러 집이 어울려서 한 그룹을 만들어 주문을 하면 한곳으로 갖다 드립니다. 최근에는 직거래를 하는 유기농 매장이나 생활협동조합과 같은 단체들에서도 꾸준히 주문이 들어옵니다. 다른 계란을 도저히 못 먹겠다며 택배를 보내 달라고 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계란도 부족하고 인력도 없다 보니까 해드리지 못하고 있어 죄송스럽습니다.


Q. 양계 한 가지로 수익을 내고 계신데 일 년 총 수익은 어느 정도 됩니까?


A. 19억원 정도가 1년 매출액입니다. 그 중에 저희가 얻는 수익금은 대략 7~8% 정도로 봅니다. 일반농장의 경우 적게는 20%, 많게는 30% 정도의 수익을 본다고 하는데 저희는 10%가 채 안됩니다. 보통은 계란 가격이 비싸니까 수익이 많이 날거라고 생각하는데 풀 농사도 지어서 닭들이 좋아하는 사료를 만들어 줘야 하고 닭들의 환경을 최적화해서 편안하게 해줘야 하다 보니 인력이 참 많이 들어갑니다. 이거 저거 다 빼고 나면 순이익이 채 1억이 안 됩니다. 겨우 밥만 먹고 사는 거지요.(웃음)


현재 저희가 판매하고 있는 계란 가격(6,000원, 15개 포장단위 기준)은 2011년도 그대로입니다. 지난해인가 일반 계란가격은 인상됐지만 저희는 원래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더 올리면 안 되니까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생산비가 오르다 보니 어려움이 많습니다. 만약에 저희 계란을 일반 시장에 내놓는다면 바로 적자가 나는 거죠. 비싼 사료비에 인건비는 많이 나가면서 계란은 적게 낳으니까요. 솔직한 심정이지만 고급계란을 생산해 낸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Q. 양계하는 분들께 친환경 양계법을 알려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처음에는 교육을 했었습니다. 쌀을 생산하는 분들과 양계를 하시는 분들이 대상이었는데 약 15년 정도 교육을 하다 그만뒀습니다. 잘 따라 하던 분들이 조금 익숙해지니까 수익을 내기 위해 독자적으로 하더라고요. 제가 강조하는 것은 순환농업입니다. 생산할 때 거름이 들어가고 또 다시 열매를 얻은 다음에는 그것으로 거름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건너뛰고 수익만 내려다보면 일반시장에서 가격변동이 생깁니다. 양계만 하더라도 닭을 길러서 좋은 계란을 얻었는데 일반 계란과 같은 가격에 팔면 안 맞잖습니까?


Q. ‘유정란’이라는 말을 여기서 처음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A. ‘유정란’이란 말은 일본에서도 쓰는 말인데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수정된 닭이라는 의미입니다. 수탉과 암탉을 함께 계사에 넣어 평화로운 환경에서 사이좋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행복한 닭이 낳은 알을 먹음으로써 사람들도 행복해진다는 겁니다. 행복한 정신이 순환되는 거지요. 저희가 양계를 한 것도 행복해지는 사회운동의 하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정란’이라는 이름을 저희가 처음 지었던 것인데 요즘은 계사에다 수탉만 넣어주면 ‘유정란’이라 한다고 합니다. 얼마 전 모 교수님이 와서 하는 말이 요즘은 수탉에다가 수정액을 넣어갖고 ‘유정란’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겁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참 별짓 다 한다’고.


 저희는 닭도 존중해야 할 상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알을 꺼내러 닭장에 들어갈 때 “알 꺼내러왔습니다”라고 하면서 닭들의 공간에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미리 알립니다. 모이를 주러 갈 때도 무조건 들어가는 게 아니라 ‘모이 주러 왔습니다’하면서 방문할 것을 미리 알립니다. 나와 닭은 서로가 존중해야 되는 대상이지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죠. 최근 양계협회에서 찾아와 ‘미래의 양계 상을 야마기시즘 실현지가 보여 주고 있다’고 하면서 앞으로 자기들에게 참고가 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을 줘서 받았습니다. 자기들은 학자인데도 그렇게 못하고 있다면서 닭의 면역을 길러주는 방법도 닭의 복지차원에서 생각해봐야 겠다고 했습니다.


Q. 가족들의 생활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세요.


A. 여러 세대가 한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곳이면서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저희 가족은 모두 여기서 일하고 월급도 여기서 탑니다. 무소유 공동체 생활이라고 해도 정해진 법을 따라야 한다고 해서 조합법인을 만든 거고요. 저희가 일반사회와 다른 점이라면 직급이 없고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동일한 급여를 받는다는 겁니다. 한 가족이기 때문에 식사는 당연히 한공간에서 합니다.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이 조리를 담당하고 설거지 정도는 서로가 돌아가면서 하고 싶은 사람이 합니다. 세탁은 각자 내놓으면 세탁 일을 하는 사람이 옷을 걷어서 세탁해줍니다. 아기를 봐주는 사람도 따로 있습니다. 공동으로 생활하다 보면 아기가 낯도 안 가리고 사회성도 좋아집니다. 각자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여 하기 때문에 누구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역할은 있되 권한은 없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대하고 공평하게 살아가는 곳이죠. 가족 중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회의를 통해 안건을 내놓으면 가족회의를 통해 결정합니다. 누구든 각자의 의견을 말할 수 있고 그 의견을 수용하려고 가족 모두가 노력합니다.


Q. 현재 야마기시즘 보급률은 어느 정도인가요?


A. 어느 시기가 오면 전 세계에서 야마기시즘을 실현하는 곳들이 많아질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아직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다가올 미래 세계를 당겨서 생활하는 곳이다 보니 와서 생활하다가도 일반사회로 복귀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야마기시즘을 실현하고 있는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또 스위스, 브라질과 같은 나라에서도 이 운동이 시작되어 시도하는 곳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사회운동이라고 해도 실천하여 마을을 형성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거라고 봅니다. 하다 보면 실패도 따르고 그걸 토대로 다시 일어서야 하니까요.


Q. 중도에 적응을 못하고 나가는 분들이 계신다고 하셨는데 가장 큰 이유가 뭔가요?


A. 처음에는 뭔가 다르겠지 하고 들어왔다가 막상 자기가 꿈꾸는 것이 시작되면 그만 두는 이유는 일
반사회에 대한 미련입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여기서는 올라가는 것도 없고 내려가는 것도 없는 누구
나 공평한 사회입니다. 소위말해서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구축할 수가 없는 거죠. 일반사회에서 그런
생활을 해왔던 사람들이라면 자기이름이 생각나고 자기가 따로 할 수 있는 것을 원하게 되잖습니까?
자기만의 추구하는 세계를 생각하게 되면 애초 맘 먹었던 것이 달라집니다. 모두 내려놓는 무소유 공
동체생활을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들어왔던 분들은 견디기 어렵겠죠.


Q. 일반인들이 체험할 수 있는 ‘야마기시즘’ 체험프로그램이 있습니까?


A. 특별강습연찬회라고해서 특강프로그램이 있습니다. 18세 이상이면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는데 1966년에 시작해서 250회가 넘었습니다. 프로그램은 1개월 과정입니다. 요즘은 사회가 어지럽고 젊은 실업자들이 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찾아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체험자들은 1개월 동안 저희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일도 하고 강의도 듣습니다. 저희가 생산하는 계란을 드시다가 연찬회에 참석하고 싶어서 왔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최근에는 협동조합을 하려는데 참고자료가 필요해서 왔다는 분들과 외국인들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MeCONOMY Magazine December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