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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에코경제학-6〕청계천 준천(濬川, 준설)에서 배우는 치수의 지혜

 

최근 한국에서 가장 잘 산다는 강남, 서초 일대가 물바다가 되어 난리를 치렀지만 그런 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한양은 배수구 역할을 하던 청계천에 퇴적물이 쌓여 비만 오면 범람하는 바람에 시내가 물바다가 되곤 했다. 강남 서초 일대가 물에 잠겼다는 것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생리를 무시하고, 제2의 청계천이라는 반포천과 합류하는 한강의 바닥 높이를 계산하지 않고 개발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일대는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면 수억 톤의 빗물이 반포천으로 흘러가지 못해 저수지처럼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비만 오면 청계천 물난리에 골치를 썩였던 조선의 조정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 까? 그들의 지혜를 오늘에 되살려 본다. (필자 주; 청계천에 관한 역사는『청계천에서 역사와 정치를 본다』조광권 저, 여성신문사, 2005년을 전재하거나 요약했 으며, 현대적 설명과 소제목은 필자의 가필임을 밝혀둔다)   

 


영조의 자랑, 개천(청계천)의 준설 공사


전국 8도와 수도권 백성을 동원한 대대적인 개천(청계천) 준설을 단행한 태종, 세종 이후 개천 정비에 가장 큰 힘을 쏟은 임금은 영조였다. 영조는 재위 49년(1775 년) 8월 6일, 세손을 데리고 광통교의 석축을 살펴보고 지은 어제준천명병소서(御製 濬川銘幷小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기를 근 50년 동안 무슨 일을 했냐고 하면, 나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세 가지 일했다고 한다.”

 

영조가 말한 세 가지 일은 탕평(蕩平), 균역(均役), 그리고 준천(濬川)이었다. 영조는 이 가운데 균역과 준천은 성공했으나 탕평은 실패했다고 밝혔다. 태종·세종 때 어느 정도 준설이 이루어졌던 개천은 이후 300년 동안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 결과 영조가 즉위한 1725년 토사가 개천 바닥을 거의 메울 지경이 되었다. 한양이 물에 잠기자 영조가 탄식했다.    


“오호라, 개국 초 한양을 수도로 정할 때 어찌 이러한 폐단이 있었겠는가? 백성들이 늘어나고 기강이 해이해지고, 여러 산은 민둥산이 되어 모래와 돌이 쓸려 내려 개천을 모두 메워버렸다. 심 지어 을해년(1755년 영조 31년)에 광통교 아래는 모두 범람했으 니 이미 그때 한심한 지경 이르렀다.”


도성 주변에 있는 산의 황폐, 
퇴적물로 높아진 하천 바닥, 하천 범람의 원인


개천은 영조 대에 이르러 임금이 보기에도 답답한 상황이었다. 개천의 하상(河床, 하천 바닥)이 높아지고 수구(水口, 물이 흘러들고 나가는 곳)가 자주 막혔다. 개천이 죽어가는 하천이 된 요인은 크게 2가지였다. 우선, 한양도성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이 황폐한 탓이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도성을 둘러싼 산림보호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송림이 울창했고, 덕분에 모래와 돌이 떠내려 오지 않았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국법이 해이해진데다가 송충(松蟲)까지 번져서 도성 주변의 산림이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큰 비가 오면 많은 사석(沙石 )이 하천으로 흘려 내려와 개천의 하상을 메워갔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그런 상황을 “수십 리에 걸쳐 어린 소나무도 남은 것이 없고, 사방 의 산이 모두 붉게 되어 보기에도 참담하다”고 탄식했다. 여기에 16세기 초부터 시작된 이상 기온 현상으로 태풍, 폭우, 우박, 서리, 눈 등이 끊이지 않았다.

 

둘째, 개천의 유지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임진, 병자 두 차례의 전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양의 인구가 급증했다. 1657년(효종 8년) 한 성부의 호구는 만5776호, 8만 572가구였지만, 10년 후엔 2 만 3889호, 19만 4천 가구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생활하수가 증가하는 한편 주민들이 개천변에 채소밭을 개간해 수로를 막히게 했으며 개천 바닥은 걸레, 깨진 항아리 등 생활 쓰레기로 뒤덮여 갔지만 200년 이상 방치했으니 모래와 돌 등 퇴적물이 하류로 쓸려 내려가지 못하고 개천 바닥에 쌓일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300년 만의 대역사, 신중한 영조 백성에게 준설 의사를 물어

 

개천의 관리는 태종 12년 제1차 공사 때 설치한 개천도감(開川都監)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세종 때는 서울 안의 개천과 다리를 공조에서 관리하게 했으나,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 都監)으로 책임이 넘어갔다.

 

세조 6년에 단행된 중앙 관서의 기구축소에 따라 수성금화도감이 폐지되고 수성은 공조로 금화는 한성부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개천과 교량에 대한 언급이 없이 수백 년이 흐르고 비만 오면 범람을 일으켜 한양이 물바다가 되었으니, 영조 때에 이르러 대규모 준천 작업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영조는 개천을 준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조는 신중했다. 준천의 시행 여부를 조정 신료와 백성들에게 물어가며 오랜 시간 고민했다. 


“방민(坊民,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개천을 준천하는 것이 좋은가, 아닌가를 순문(巡問)했다. 임금이 돌아오다가 광통교에 이르러 시냇가에 사는 백성들을 불러 순문하기를 “어영대장(御營大將, 훈련도감과 금위영의 대장과 같이 삼군문의 대장으로 도성의 방어는 물론 궁궐의 숙위까지 담당하던 수도방위의 책임자였다. 또한 국왕의 행행을 수행하던 수가 대장의 임무를 맡았다) 이 개천이 메워져 막혀 있다고 아뢰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민력(民力, 백성의 노동력)을 거듭 지치게 할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개천이 막혀 있는 것이 이와 같고 또한, 도성을 물에 잠기게 하지 않으려면 개천을 파내는 것이 더더욱 급선무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영조 29년(1753년)에 영조는 한성 5부(서울 전 지역. 당시 한 성부는 동·서·남·북 중부의 5부가 있었음)의 나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듬해에는 명정문 (明政門, 궁궐 정전의 정문)에서 조참(朝參, 문무의 관원들이 궁궐의 조정에 나가 왕에게 네 절하는 예의를 행하고 왕명을 받는 조회의식)을 행할 때, 서울 지역 주민을 불러 개천을 파는 것이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물었다.

 

그러나 찬반이 있어 의결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같은 해 영조는 과거시험 때 명정전에 나가 “개천을 트이게 하는 것이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묻는 문제를 냈다. 영조 35년 10월 조참을 할 때 문무백관에서 개천 준설에 관해 물었다. 그때 “내를 파내는 것이 편리하다”라는 의견을 모아, 300여 년 만에 준천 사업을 시행할지를 백성에게 물었다.  

 

한양 백성을 물난리에서 구한 개천의 준설 


“도랑을 파내는 일절은 오직 백성을 위한 것이니.... 준천하기로 결정한 이후 음식이 달갑지 아니하고 잠자리도 편치 못하였으니, 역시 너희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준천하는 일에 불편한 마음을 가졌다면, 생각한 바를 전달하고 억지로 따르거나 물러가지 말도록 하라”면서 영조는 준천이 백성을 위한 일이긴 하지만, 자발적 참여가 없으면 시행하기 어려운 만큼 각자의 생각을 말하면 그것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영조의 말에 도성 방민들의 생각과 반응이 긍정적이었던지 영조는 같은 해 10월 29일, 홍봉한, 김상로, 홍계희 등과 함께 준천에 대해 논의하고 준천을 관리할 관청의 이름을 준천소(濬川所, 훗날 준천사)로 정하고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 한다. 영조는 당시 준천을 결정하기까지의 심정을 이렇게 서술했다.  


“신료들에게 물어보고 백성들에게도 물어보았으나 그 방도가 막연하였으므로 이에 나는 준천할 것을 명하였다. 대궐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들렸으니 여러 차례 오간 수문에 나아가 파내는 일을 독려하고 남은 물력은 비축하도록 하였다. 준천사를 설치해 매년 개천을 고쳐 쌓도록 하니, 이후부터는 개천이 모두 소통되고 천변의 백성들이 편안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뉴딜 정책, 당시 20만 명이 동원된 개천 준설


영조의 개천 준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뉴딜 정책이나 다름없었다. 뉴딜 정책은 1933년 미국 연방정부가 세계 대공항 극복을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이 추진한 테네시강 유역에 26개의 댐을 건설하는 대규모 공사였다. 영조는 그보다 2백 년 앞서 국가의 재정을 푼 대형 국가 프로젝트였다.

 

영조의 개천 준설은 크게 두 차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당시 개천은 토사가 쌓여 개천 바닥이 양편 언덕과 같이 평평했다. 이 토사를 걷어 내고 개천의 깊이와 폭을 예전처럼 회복하는 것이 경진(庚辰)년 준천 공사의 기본사업 목표였다. 개천 본류 뿐만 아니라, 상류 지역과 지류, 세류, 분류(分流)에 대해서도 시행했으며, 경복궁,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 안에 있는 물길을 준설해 물이 잘 흐르도록 했다. 


공사는 총 57일에 걸쳐 이루어졌고, 동원된 인력은 한성부 민 15만 명, 노임을 내는 고정(雇丁) 5만 명 등 총 20만 명이었다. 재정은 전(錢) 3만5천 민(緡, 돈을 꿰는 데 쓰는 단위, 돈꿰미), 쌀 2,300석이 투입되었다. 말하자면 대형 국가 프로 젝트를 시행하면서 국가재정을 백성에게 푼 셈이었다.

 

영조의 두 번째 준천은 영조 49년(1773년) 계사년에 시행되었다. 주로 개천 양안을 석축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 공사는 2달 후인 8월 초에 완성되었다. 8월 6일 영조는 왕세손(후일 정 조)과 함께 광통교에 나가 완성된 석축을 살펴본 후에 공사에 참여한 자들을 치하하고 상을 내린 뒤 직접 준천명(濬川 銘)과 소서(小序)를 짓기도 했다. 


이처럼 영조의 개천 준천은 하천 바닥에 쌓인 퇴적물을 대대적으로 퍼내는 동시에 수로를 직선으로 변경하며, 개천 양안을 석축으로 쌓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준천의 기준점이 되는 ‘경진지평’ 수위를 수표교에 표시하도록 하고, 그 후로 2~3년마다 정례적으로 준천이 실시됐다. 특히 영조는 준천과 양안 석축공사를 한 후 천변 곳곳을 택지로 만들어 유민들이 기거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준천에 필요한 인력 동원을 위한 조치이기도 했지만, 천변에서 새로 거주지를 마련한 사람에게는 장사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이처럼 지속해서 준천이 이루어진 개천 주변은 비교적 안정된 공간으로 탈바꿈이 됨으로써 시전(市廛)의 배후지로서 수공업 작업자들이 들어서고 중인 계층이 그곳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영조대의 대대적인 준천 사업과 정조대로 이어 지는 도로와 교량 보수 사업 등 도시 정비 사업은 유민의 서 울 유입에 때맞춰 서울을 상업 도시로 키워나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강과 반포천의 준설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아야

 

영조가 다시 보위에 앉아 강남의 물난리를 보았다면 어떤 하명을 했을까? 아마도 그는 강남·서초의 빗물이 모여 흐르도록 반포천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으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강남의 저지대가 반포천의 하천 바닥보다 높도록 반포천과 반포천이 합류하는 한강을 파내서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하수관을 교체하고 고인 물을 담는 거대한 지하 탱크를 만들고 하천으로 물을 퍼 올린다고 해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이 다스려지는 것은 아니다. 물의 힘을 어떻게 막겠는가? 자연의 이치를 무시하면 어떠한 대책에도 강남과 서초 일대는 비가 오면 영원히 물에 잠기는 도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 편에는 선왕의 뜻을 받든 정조의 개천의 준천과 예나 지금이나 찬반양론이 분분했던 하천의 준설에 대해 살펴봅니다.) 

 

 

MeCONOMY magazine September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