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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분석

시진핑 1인 지배체제 ‘공동부유’ 본격화하나

지난 10월 23일 제20차 당대회 폐막 후 발표된 7인의 상무위는 시진핑과 그에게 충성하는 측근 인물들로 전원 채워졌다. 새로 상무위에 진입한 리창 상하이시 서기가 리커창 총리의 후임으로 내정됐다. 공청단 출신인 리커창 총리와 왕양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은 당 중앙위원에서 탈락하고 후춘화 부총리도 정치국 위원에서 배제됐다.
 

 

이제 14억 중국인이 시진핑 1인의 통치 아래에 들게 됐다. 이제 계파도 사라지고 시진핑의 권력 앞에 그를 견제할 장애물은 제거됐다. 이번 3연임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처럼 종신집권으로 갈 것으로도 점쳐지고 있다. 시진핑 주석의 지난 10년간 보여준 권력장악 과정을 보면 문화혁명을 비롯해 파란만장했던 마오의 권력투쟁 양상에 비해 스마트할 정도로 능수능란했다고 하겠다.

 

시진핑 주석은 등소평 이래로 추진해온 개혁개방정책의 기조를 수정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사상을 준비해왔다. 장기간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한 결과 놀라운 경제성장을 달성했지만 부패의 만연, 양극화 심화, 사회주의 이념의 해이라는 모순을 낳았다. 이런 문제의식은 시진핑 주석의 전유물은 아니고 전임 장쩌민, 후진타오 총서기도 인식하고 있었지만 뚜렷한 실행 수단을 찾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시진핑은 가장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부패청산’을 들고 나왔다. 부패 운동을 통해 하나하나씩 정적을 제거하고 부패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 없는 당과 관료, 하급관리까지 사회 지도층들의 기율을 다잡아왔다. 그는 동시에 개혁개방의 모순을 해결하면서 성장보다는 발전을, 분배를 강조하는 ‘공동부유’라는 사상을 들고 나왔다.

 

이번 20차 전당대회의 하이라이트는 후진타오 전 서기가 공개리에 중계된 당대회 폐막일 회의 중 퇴장한 장면이었다. 나중에 건강이 안 좋아서 퇴장했다고 관영매체들이 해명했지만 추가 공개된 장면을 볼 때 납득되기 어려운 것 같다.

 

국가 의전과 중국 사정에 밝은 전문가에 따르면 후진파오의 퇴장은 시진핑 측에 의해 사전에 모의된 각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을 내놨다. 5년마다 열리는 당대회는 앞으로 5년간 국가를 관리할 인사와 정책방향을 대외에 선언하는 자리다. 국가 의전상 전임 최고지도자인 후진타오 전 주석이 참석하지 않을 수 없다. 장쩌민 등은 고령으로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이 후진타오 전 주석만은 참석해야 모양을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시진핑 입장에서는 자신의 측근들로만 구성된 상무위 인사 발표안을 본 후진타오가 회의장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커다란 리스크로 생각했을 거란 해석이다. 전 세계에 중계되는 최종 폐막일 행사에서 만에 하나 불미스런 일이 일어난다면 본인의 권위에 엄청난 데미지를 입을 수 있는 사안일 수밖에 없다. 후진타오 전 주석의 왼쪽에 앉은 리잔수 상임위원장이 후진타오 전 주석이 붉은색 커버의 파일을 보려하자, 그것을 슬그머니 빼돌리고 퇴장시킨 거라는 얘기다.

 

후진타오 전 주석은 49세라는 젊은 나이에 등소평에 의해 발탁돼 장쩌민 주석 시절 그의 후계자로서 상무위에 진입한 인물이다. 후진타오는 장쩌민 주석 아래서 10년, 본인이 주석직에 있으면서 10년 등 도합 20년을 권력 심부의 중심에 있었다. 후진타오는 주석직에 있을 때 자신의 후계자로 리커창을 밀었으나 당시 반대 세력들은 시진핑을 미는 바람에 2명의 후계자를 두는 모양새였다. 후진타오와 리커창, 시진핑의 삼각관계는 15년간 지속됐다고 할 수 있다.

 

시진핑 주석에게 후진타오는 직전 주석으로서 두려운 존재였을 터이고, 경쟁자였던 리커창을 지난 10년간 끌어안고 있었다. 이번 19차 당대회에서 질긴 15년간의 삼각관계를 청산하고 자신만의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자리였다고 볼 수 있다. 후진타오 전 주석이 퇴장하면서 시 주석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도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자신을 퇴장시키자 진의를 눈치챈 그가 좋은 말을 건넸을 리는 만무했을 터, 그가 떠나면서 리커창의 어깨를 툭 친 것은 권력의 무상함을 표현한 것 아닐까 짐작해본다.

 

왜 독재체제 더 강해지나

 

모든 권력이 공산당에 집중돼 있고 전 국민 감시가 가능한 체제에서 1인 통치 체제로 가는 것은 필연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중국은 워낙 큰 나라이다 보니 마오쩌둥 사후 여러 계파의 연합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런 초기 권력 형성 과정에 따라 시진핑 이전 30년 간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했지만 그것이 지속될 수 없었다. 민주주의 체제처럼 권력의 분점을 제도적으로 강제한 시스템이 아닌 중국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 아래서 권력 분점은 그 자체가 시스템적 모순이기도 하다.

 

권력 속성뿐만 아니라 개방 이후 만연된 부패를 일소하고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도 강력한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대적 상황도 1인 독재의 조건이 된 것으로 보인다.

 

집단지도 체제 아래서는 여러 개 파벌이 있고 그 파벌 아래 가짓수로 벌어지면 수십 개, 수백 개 작은 계파로 나눠지면서 각 계파별로 부패가 일어난다. 이것을 어느 정도 청소하려면 단단하게 결심하여 신속하고 능숙하게 때로는 뱀처럼 교활해야 한다.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한때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고위급일수록 언론을 통한 폭로와 사형과 사형에 준하는 엄벌은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부패 척결을 강력하게 하지 않으면 뒤집기를 당할 수 있다. 상대 파벌과 불만을 가진 자파의 내부자가 공모하여 저항하면 무력화되고 식물 지도자가 되거나 쫓겨날 수 있다.

 

시진핑 주석이 처음부터 부패척결을 들고 나옴으로써,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그것은 권력을 독점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되었다. 부패와 양극화를 연결시키면 여론을 끌고 가는 데 좋은 명분을 얻을 수 있다. 시진핑 주석은 작년부터 공동부유를 강조하기 시작했는데, 양극화를 해소하고 다 같이 잘 사는 ‘공동부유’는 부패척결 과정에서 자연스레 발전한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속적인 부패척결로 어느 정도를 성과를 거뒀다면 이제는 공동부유로 인민의 지지를 얻겠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공동부유 사상은 중국 전통의 대동사상에서 찾기도 하는데, 절실한 시대적 상황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 사상은 무의미하다. 시 주석은 극심한 양극화와 개혁개방의 폐단을 공동부유로 해결해보려는 시도를 할 것으로 점쳐지는 점에서 탁월한 정치 센스를 가진 인물로 생각된다.

 

또 권력 경쟁 게임이 비공개인 점도 종국에는 1인 독재체제로 가는 경로인 듯하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상적인 선거와 국회 활동을 통해 공개리에 권력 경쟁이 일어난다. 중국과 같은 폐쇄적인 체제에서는 권력 핵심부 세력들과 정보기관 등을 통해 상층부에 대한 부정확하거나 의도적으로 가공된 정보가 은밀히 유통된다. 독재자는 이 정보를 언론에 공개하여 여론의 공분을 사서 처벌한다. 이런 체제에서 사법부와 공안, 언론은 하수인 역할을 한다.

 

독재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투명성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 왜곡과 과장이 다반사로 이뤄진다. 그 처벌은 야만적인 폭력성을 동반한다. 이런 비공개적인 권력 투쟁에선 룰이란 없고 상대가 완전히 제거될 때, 끝나는 게임이므로 종국엔 1인 독재체제로 귀결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일단 1인 독재체제가 되면 느슨해지는 게 아니라 자기 측근세력에게로 권력이 모이는 것도 두렵다. 제2인자란 있을 수 없다. 측근을 내세워 측근을 견제하거나 제거하는 일을 주기적으로 벌인다. 북한 김일성 3대 일가들이 대대로 하는 수법이다.

 

1인 체제를 유지하려면 외부의 적을 상정하는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이 유용하다. 푸틴이 끝없이 외부와의 대결 관계를 이용하다.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만용을 감행했다. 시진핑 주석은 이미 호랑이 등에 탔기 때문에 공세 일변도로 계속 갈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체제에서는 1억명에 가까운 공산당원처럼 조금이라도 사회적으로 혜택을 누리는 계층은 저항하지 못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특권을 잃어버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민중 반란이 조직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중국 공산당 체제는 천안문 사태의 학습 경험에 따라 철저히 국민들을 감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따라서 시진핑 1인 통치체제가 종신집권으로 가는 데에 걸림돌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1인체제의 특징에 대해서는 우리는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1인 체제를 지켜봐왔다. 단 한 사람의 의지와 판단과 심지어 희로애락에 의해 국가 정책이 좌우되는 체제다. 우리는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중국에서 그런 모습을 이제 보게 됐다. 시 주석과 그의 측근들의 움직임과 중국 언론의 보도와 논평, 중국 인민들의 동향을 예의 주시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시진핑 1인 지배제제는 중국의 가장 큰 문제인 ‘부패’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책의 일관성을 추진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제로 코로나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는 것과 같은 부정적인 효과를 보이는 것도 있으나, 부패 청산, 공동부유과 같은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데는 유리하다.

 

개방개혁 후퇴, ‘공동부유’ 전환은 경제엔 안 좋을듯

 

1인 지배체제가 되면 경제는 쇠퇴할 것이 틀림없다. 먼저 외국 자본은 떠나간다. 중국에 있던 외국 공장들은 이미 상당수 철수했고 지점과 판매점만 남겨두게 될 것 같다. 상무위원들이 전원 시진핑의 측근으로만 이뤄지면 시진핑의 심중 읽기 경쟁이 벌어질 것이고 그런 분위기에서 정책의 유연성은 잃어버린다. 제로 코로나 정책이 경제적 악영향과 사회 불만에도 실시되는 이유다. ‘No’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경제 정책이란 고상한 이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책의 유연성과 민간 조직 및 개개인의 자율성, 응분의 보상으로 성장한다. 시진핑 체제는 이 세 개를 모두 잃어버릴 위험성이 크고 이미 그런 조짐을 보여 왔다.

 

당대회 기간인 10월 18일에 발표해야 했던 7~8월 국내총생산 등 주요지표를 발표하지 않고 연기했다. 세계2위의 경제대국이란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표가 암울해서 당대회에 나쁜 영향을 미칠까 염려해서 그런지 모르나 대외신용과 경제통계 신뢰에 마이너스였다.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이 화정되자 뉴욕과 홍콩, 상하이 증시 등에서 중국 기업 주가가 폭락했다. 중국 권력기구의 의사결정 경직성, 계속되는 제로 코로나 정책이 중국경제의 미래에 부정적일 거라는 시장 반응이다.

 

서방언론과 대댜수 전문가들은 시진핑 1인체제와 공동부유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나 공동부유 실행은 상당한 야심작이 될 수도 있다. 공동부유의 구체적인 방안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공동부유 사상이 기업과 가진 자들을 설득하여 제도와 정책으로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인민들로 열렬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시진핑 주석이 지적한 대로 현재 미국식 자유시장 자본주의 모델과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모델이 각각 극심한 양극화와 무기력한 성장정체의 수렁에 빠져 있다. 중국의 공동부유 실행이 초기에 성공을 거둔다면 민주체제 국가진영에도 적지 않은 도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시진핑 총리는 미국과의 기술 경쟁에서 이기겠다고 재차 선언했다. 시장 없는 기술은 무의미하다. 시장도 자국시장만으로는 오히려 퇴보를 면할 수 없다. 과학의 진보는 시장과는 무관하게 진리 탐구의 목적으로 이뤄질 수 있으나 기술 발전은 당초부터 인간과 시장의 필요에 의해 개발되는 것이다.

 

기술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서 발전돼야만 유의미한 개발이 이뤄질 수 있다. 중국 시장은 독재 체제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중국 국영기업과 여타 중국적 기업들이 독과점의 이익을 누리게 돼 수요자의 요구와 무관한 기술 개발이 이뤄지거나 현상유지는커녕 부실화될 위험이 커진다. 일종의 모럴해저드가 체질화된다. 이 점을 유의하지 않으면 공동부유는 말할 것도 없고 저성장의 경로에서 되돌아 나올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시진핑은 경제성장의 하락을 예견하고 안보를 강조해왔다. 하락하는 경제성장 실적에 대한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대미 강공 정책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2027년 대만 침공설도 유력한 가설로 부상하고 있다.

 

지금은 미-중 대결국면이 강고할 것으로 예상되고 중국과 대만 간 긴장 고조가 군사 충돌로 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지만 그 모든 것은 역사의 강물에 흘러가고 말 것이다. 과거 2차대전 후 미국과 중공 간 냉전 기간이 대략 30년 지속됐다. 그 당시는 거의 교류를 못했다.

 

지금은 미-중 간 신냉전이라고 해도 교류를 완전히 중단할 수도 없다. 이 세상은 완전한 악도 선도 없고 완전한 실패도 성공도 없다. 미-중간 다시 화해로 돌아설 때까지 한국은 부회뇌동하지 말고 이끼 낀 징검다리를 건너듯 조심스런 걸음을 걸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